[익숙한 것 낯설게 보기] #12. 비주류였던 존 래스터가 만든 창조의 제국 – LG그룹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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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 낯설게 보기] #12. 비주류였던 존 래스터가 만든 창조의 제국

작성일2016-08-22 오후 3:37

얼마 전 픽사의 17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도리를 찾아서>가 개봉했는데요. 역시 흥행에 성공해서 픽사의 마법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류가 된 픽사의 애니메이션, 그 시작은 정확히 30년 전 이맘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존_라세터

1986년 8월 텍사스주의 댈러스 컨벤션센터에서 컴퓨터그래픽 컨퍼런스인 시그래프(SIGGRAPH) 총회가 열렸는데요. 바로 몇 달 전 스티브 잡스에게 인수되어 루카스필름 컴퓨터 사업부에서 독립한 픽사가 <룩소 주니어>라는 2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을 출품했습니다. 이제는 픽사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애니메이터, 존 래스터가 만든 작품인데요. 작품이 상영된 후 컴퓨터그래픽을 하는 엔지니어 친구가 와서 래스터에게 물었습니다.

“존, 그런데 그 큰 전등은 엄마야? 아니면 아빠야?”

그 순간 래스터는 자기가 성공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래스터는 당시로서 최첨단 기술을 사용했지만, 그는 이 기술로 캐릭터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존 래스터 감독의 '룩소 주니어' (이미지 출처: 네이버)

존 래스터 감독의 ‘룩소 주니어’ (이미지 출처: 네이버)

지금까지 개봉한 16개 작품을 100% 히트시킨 픽사의 창작물을 이끌어온 래스터. 그는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주고,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킨다”라는 명언을 남겼죠. 이건 어릴 때부터의 생각이었습니다.

기술에서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보다

1957년 할리우드에서 태어난 래스터는 고등학교 때도 만화영화가 제일 좋았습니다. 래스터는 친구들 몰래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러 다녔고, 어느 날 어머니에게 디즈니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고등학교 미술교사였던 어머니는 정말 멋진 목표를 세웠다며 격려해 줬습니다. 이후 디즈니에 자신의 그림을 보내기 시작했고, 결국 월트 디즈니가 세운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Arts)에 입학했죠. 괴짜 감독 팀 버튼보다 1년 먼저 들어온 래스터는 애니메이션에 미쳐있는 학생들이 모인 곳에서도 단연 돋보였습니다.

존-라세터

학창시절에 만든 두 편의 작품이 애니메이션 부문 학생 아카데미상을 연이어 받은 것입니다. 래스터는 졸업 후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으며 디즈니에 입사했지만, 당시 암흑기였던 디즈니에서의 작업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 실사영화 작업을 하던 동료들이 SF 영화 <트론>의 몇몇 장면을 봐달라고 래스터를 불렀습니다. 래스터는 그때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최초의 신(scene)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기술을 애니메이션과 결합하면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겠다고 직감한 겁니다. 이후 그는 돈이 많이 드는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하자고 거듭 주장하다가 결국 잘렸습니다.

이종 분야 엔지니어들과의 활발한 교류

컴퓨터그래픽에서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봤던 래스터는 루카스필름 사람들과 교류했고, 1984년부터 여기서 일하게 됐습니다. 그림만 그렸던 래스터는 이곳에서 컴퓨터그래픽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익혔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다양한 분야의 엔지니어들과 교류하면서 아이디어를 넓혀 나갔습니다.

그러나 래스터는 늘 비주류였습니다. 루카스필름은 특수효과를 하는 곳이었고, 스티브 잡스에게 팔린 이후 픽사는 영상 작업용 슈퍼컴퓨터나 소프트웨어를 파는 게 주업이었습니다. 래스터의 애니메이션은 이런 상품을 마케팅하는 수단에 불과했죠. 애니메이션 기술력이 알려져 한때 광고로 돈벌이를 하기도 했지만, 래스터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1995년 토이스토리를 개봉했고 대박이 나자 픽사는 영화사로 탈바꿈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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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과 아이디어가 숨쉬는 픽사

기존 상식에서 벗어나 다른 것을 보았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끝까지 열정을 잃지 않았던 래스터는 자신의 경험을 픽사에 그대로 각인시켰습니다. 래스터를 비롯한 경영진은 사람들의 엉뚱한 아이디어에서 혁신적인 작품이 나온다는 생각에, 직원들에게 충분한 권한과 자율성을 주고 있습니다. 30여 년 전 디즈니에서 래스터는 그러지 못했지만, 픽사의 직원들은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면 윗사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 실험하고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다음날 오전 일일 리뷰회의에서 동료들과 나눕니다. 미완성 상태에서 말입니다.

Pixar_Studios

초기의 아이디어가 획기적인 혁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픽사 직원들은 완결성이 떨어지는 작업물을 동료들에게 털어놓는 데 익숙합니다. 이처럼 픽사는 사람들의 아이디어 교류를 적극 권장합니다. 픽사 대학이라고 사내 교육과정을 만들어서 다양한 분야를 배울 수 있게 했는데, 사실은 이게 학습 목적도 있지만 서로 다른 분야의 직원들이 충분히 교류하라는 목적이 더 크다고 하는군요.

다양성의 위력

픽사가 구성원들의 다양성과 엉뚱함을 활용하려고 하는 건, 영화산업이 고도로 불확실한 곳이기 때문일 겁니다. 예전에 사이언스지에 이런 논문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대장균을 배양해서 일부러 영양분을 빼앗거나 산소를 차단했습니다. 그랬더니 박테리아가 돌연변이를 급격하게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추가 검증을 통해 생체기능에 이상이 생겨서가 아니라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랬다는 걸 밝혀냈습니다.

물벼룩의 특이한 생태도 마찬가지 입니다. 평소에 물벼룩은 무성생식을 합니다. 암컷들이 자신과 똑같은 새끼를 낳는 것이죠. 그런데 가뭄이 들거나 겨울이 다가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암컷이 수컷을 낳기 시작하고 유성생식으로 방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런 알들은 다양성이 늘어나 가뭄이나 겨울을 버티는 녀석이 반드시 나오게 되는 것이죠.

이노베이션을 연구해온 경영학자들이 똑같은 패턴을 발견했는데요. 제품개발, 기술혁신, 발명 등 전세계 대규모 공모전들을 조사해 봤더니, 다양성의 위력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경진대회 참가자들을 기존 방식을 따르는 그룹과 비전통적 방식을 적용한 그룹으로 나눴더니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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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전통적 방식이 평균적으로 따지면 더 좋은 아이디어를 성공시켰습니다. 대체적으로 수준 높은 아이디어를 동원했고 성공확률도 높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비전통적 방식은 보잘것없는 아이디어도 많았고 평균적으로는 그저 그런 게 많았지만, 최고로 좋은 아이디어는 여기서 나왔습니다. 확률은 낮지만 불확실성을 돌파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 예외가 많이 생기는 비전통적 방식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일을 즐기게 하라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조직 차원에서는 다양성과 비전통적 방식으로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개인 입장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 것 같네요. 합리적인 부모는 자녀가 아이돌이나 스포츠스타가 되겠다고 하면 대부분 말립니다. 그보다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스타는 1% 안에 들어야 화려한 삶을 살지만 의사나 변호사는 50% 이상만 되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 전체를 위해서는 스타도 필요하지만 내 자녀가 그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싫은 겁니다. 그래서 기업에서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평균적인 성과를 얻는 걸 선호합니다.

픽사는 실패의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습니다. 영화 단위별로 고용계약을 하는 다른 할리우드 영화사와 달리 픽사는 정규직으로 직원을 고용해서 실패 비용을 줄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조직 내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줄인 것이죠. 더 중요한 건 구성원들이 일을 즐기는 문화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권한과 자율성을 주는 게 바로 이 때문이죠. 부모가 아무리 말려도 춤과 음악에 미쳐있는데 어쩌겠습니까. 이런 열정이 있기에 <도리를 찾아서>의 전편인 <니모를 찾아서>의 고래 뱃속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술팀 사람들은 해안가로 떠밀려와서 죽은 쇠고래의 몸 안에 기어들어가기도 했던 것입니다.

래스터는 루카스필름이나 옛날 픽사 시절이 너무 좋았다고 회상합니다. 지금 성공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트론>에서 컴퓨터그래픽 영상을 본 후 <토이스토리>로 명성을 얻기까지 15년은 그에게 성공을 위해 인고하고 참았던 시절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매일매일 애니메이션을 혁신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 시절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실패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병주 프로필

신문과 잡지에 경영 칼럼을 기고하는 칼럼니스트이자 경영 전문가입니다. 오랫동안 기업의 창조와 혁신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평소 인문학적인 글쓰기를 즐기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글을 쓰고자 노력합니다. 저서로는 <3불 전략>,<촉>,<애플 콤플렉스>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