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 낯설게 보기] #2. 1차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 총성이 멈춘 까닭은? – LG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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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 낯설게 보기] #2. 1차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 총성이 멈춘 까닭은?

작성일2014-12-17

1915년 어느 날 서부전선, 새벽부터 연합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총격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쓰러지는 병사들은 적었지만 참혹한 광경이었습니다.그런데 아침 8시가 넘어서자 양 진영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공격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희한한 장면이 이어졌습니다.

연합군과 독일군 병사들이 벙커에 들어가 식사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병사도 있었고 심지어 커피를 타 마시기도 했습니다. 간 큰 몇몇은 참호 밖으로 나와 적의 사정거리에서 서성거리며 휴식을 즐겼습니다. 이런 장면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듬해부터 전쟁 내내 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솜 전투처럼 참혹한 공방이 이어지던 때에도 서부전선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솜전투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양쪽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싸워도 군인들의 희생만 커질뿐 영토의 변화 없이 서부전선은 그대로 고착화되었습니다. 양 진영 모두 깊은 벙커와 참호를 파고, 철조망과 토벽으로 방어벽을 두른 채 싸우는 참호전이 지속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자 양쪽 병사들은 자기파괴적인 전투를 스스로 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 창고 쪽으로는 사격을 하지 않았으며, 날씨가 춥거나 비가 올 때는 모두 전투를 쉬었습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가장 적대적인 공간에서 협력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도 6백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한 가장 참혹한 전쟁터인 서부전선에서 말이죠. 사령관들은 이런 행동들이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릴 거라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막았습니다. 고의적으로 전투를 피하는 병사들은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중대 전체가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한번 나타난 협력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발포 명령이 내려져도 양쪽 군대는 엉뚱한 타깃에다 폭약과 탄알을 일부러 낭비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의 이타적 행동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이런 행동은 사실 철저히 합리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게임이론은 이기적인 사람들에게서도 이타적인 행동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한번 시행된 게임에서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지만 게임이 반복되면 이타적인 협력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상대방과 사과 두 개를 나누는 게임을 한다고 칩시다. 서로 양보(협력)하면 하나씩 나누어 먹습니다. 반대로 둘 다 양보하지 않고 싸우면 손에 쥐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욕심(배반)을 내고 상대방이 양보하면 두 개 모두 내 것이 되고, 내가 양보하고 상대방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면 두 개 모두 상대방 것이 됩니다. 이때 내 입장에서는 이기적인 선택이 유리합니다. 상대방이 양보를 하면 욕심을 부려서 두 개를 갖고, 상대방이 욕심을 부리면 나도 똑같이 욕심으로 대응해야 최소한 사과를 빼앗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은 상대방도 마찬가집니다. 따라서 둘 다 이기적인 선택을 하게 되면 모두 손해를 보게 됩니다.이것이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게임입니다.

게임이론

그런데 이런 게임을 한번만 하지 않고 반복해서 하게 되면 양보하는 선택이 합리적입니다. 계속해서 사과를 잃는 것보다는 사과 하나라도 계속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양보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증명이 되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생략하는 게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분명한 건 이기적인 사람들에게서도 협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일상에서도 이런 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털끝만큼도 손해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사람들도 이웃에게는 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웃과는 반복적으로 만나므로 평판과 보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시골사람이 도시사람보다 순하고 착해 보이는 것도 마을 주민 대부분을 반복적으로 만나다 보니 협력과 배려가 몸에 배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이기적인 전쟁터인 서부전선에서 협력이 발생한 것도 전쟁이 고착화되어 적과 반복적으로 장기간 대면했기 때문입니다.

상호의존전략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대회가 개최됐습니다. 1980년 미시간대학의 정치과학 교수인 액설로드(Robert Axelrod)가 전세계 대학의 학자들을 모아 죄수의 딜레마 반복 게임으로 컴퓨터 대회를 실시한 것입니다. 게임이론, 수학, 심리학, 사회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자신이 프로그래밍한 전략으로 다른 참가자들과 1:1로 싸웠습니다. 최종 우승은 상호의존(Tit for tat) 전략이 차지했습니다. 상호의존 전략은 매우 단순합니다. 처음에는 일단 협력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의 이전 선택대로 응수하는 것입니다.

이 전략의 성적표를 보니 독특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상호의존 전략은 1:1 싸움에서 어떤 상대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무승부가 최고 성적이었죠. 그러나 모든 라운드의 점수를 합쳤을 때는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는 상호의존 전략이 상대방이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더라도 최대한 협력적인 상황을 이끌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장의 싸움에서는 이길 수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이기는 전략입니다. 말하자면 전투에서는 지더라도 전쟁에서는 이기는 전략인 것입니다.

오픈 이노베이션과 신뢰

환경 변화가 심해지고 위기가 일상화되면서 현대기업에서 협력에 기반한 혁신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불확실성을 이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부와 협력하여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이 몇 년 전부터 주목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픈 이노베이션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기업은 드뭅니다. 전쟁과 같은 경쟁과 이익극대화라는 이기성이 판치는 시장에서 기업도 협력의 본질에 대해 좀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협력은 지속성과 상호성, 장기적 관점이 핵심입니다. 지속적이어야 효과가 나고 혼자만이 아니라 상호간 이득이 되어야 하며 당장 손해인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덩치가 큰 대기업일수록 이를 실행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파트너를 같은 위상으로 대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레고

레고는 우연히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998년 레고는 성장전략으로 어린이 장난감에서 벗어나 성인용 제품인 마인드스톰(Mindstorms)을 출시했습니다. 마인드스톰은 레고 블록에다 소프트웨어와 전자제어 장치를 장착해 작동할 수 있게 만든 제품인데, 스탠퍼드대학의 한 대학원생이 레고 사이트를 해킹해 이 알고리즘을 공개했습니다. 당시 레고는 제품의 지적재산권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던 터라 소송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수개월간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니, 소비자들이 스스로 수많은 응용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해 제품을 더 멋지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제품과 기술에 대한 회사의 철학을 완전히 바꾸어 소비자들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마인드스톰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에 해킹할 권리를 명기했습니다. 2005년 레고팩토리 세트를 개발할 때는 소비자들의 참여를 공식화하기도 했지요. 당시 소비자들이 내놓은 설계의 질이 매우 우수해 레고 내의 개발조직 전체가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는 후문입니다.

레고가 우연히 시작된 오픈 이노베이션에 성공한 이유는 소비자를 믿고 회사의 기술을 오픈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와 협력 초기 레고는 협력 당사자가 제3자에게 정보를 유출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소비자는 다른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하지 않았고 제품의 혁신은 제한적인 수준에서 멈췄습니다. 이에 부작용을 인식하고 기밀유지협약을 최소화했더니 한 소비자의 아이디어는 다른 소비자에 의해 개선되고 발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레고는 기술이나 핵심역량을 상당 부분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서부전선의 협력을 파괴한 아이디어

1차세계대전 마른전투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양쪽 사령관들은 협력을 파괴할 기발한 아이디어를 고안해냈습니다. 이들은 병사들에게 적진에 들어가 적군을 죽이라는 기습 명령을 내렸습니다. 적군을 사살했다는 징표를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속임수를 쓸 수 없었고, 실패하면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기습을 당한 적군은 기습으로 보복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이어왔던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의 협력이 한 순간에 깨지게 됐고, 서부전선에서는 전투가 점점 참혹해졌습니다.

양 진영의 기습 작전이 목표로 한 것은 적군의 목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군사들 간에 암묵적으로 형성된 신뢰를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 외부 필진 칼럼은 본 블로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병주 프로필

신문과 잡지에 경영 칼럼을 기고하는 칼럼니스트이자 경영 전문가입니다. 오랫동안 기업의 창조와 혁신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평소 인문학적인 글쓰기를 즐기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글을 쓰고자 노력합니다. 저서로는 <3불 전략>,<촉>,<애플 콤플렉스>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