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속 세상돋보기] #28. 연변에서 온 편지 – LG그룹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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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속 세상돋보기] #28. 연변에서 온 편지

작성일2015-11-23 오후 2:09

“기뻐해주게. 연변FC가 중국 프로축구 2부리그 우승을 차지했네. 내년에는 1부리그에 뛸 수 있게 되었네. 널리 알려주길 바라네.”

연변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 K로부터 오랜만에 날아온 메일입니다. 흔히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중국동포 K를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 백두산 천지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유난히 하얀 피부에 도전적인 눈빛으로 처음부터 시선을 끄는 친구였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자마자, 뜻밖의 발언을 했습니다. “한반도 사람들은 기회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 대부분이 만주에서 활동한 반면, 반도에 남은 사람들은 일제와 타협하며 살았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K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홍범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참가한 분이라며 자랑스럽게 얘기를 이었습니다. 그는 필자의 외조부가 일제강점기에 만주와 상해에서 활동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눈빛이 다소 부드러워졌습니다.

백두산 천지

백두산 천지

천지로 향하는 버스는 잠시 후 허름한 휴게소에 들렸습니다. K는 백두산 장뇌삼을 사주면서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을 방문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붉은 악마의 경기를 직접 보려고 처음 조국 땅을 밟았는데, 공항 입국장에서 자신을 ‘외국인’ 줄에 서라고 하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K는 커다란 목소리에 분노를 실어서 이렇게 외쳤답니다. “내 조부가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분인데, 나를 어찌 외국인 줄에 세우는가?” 그러나 K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때의 서운함은 2년 전 당시에도 가시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중국동포 선수가 대다수인 연변FC는 1999년에 2부리그에 강등된 뒤 16년 만에 1부리그에 올라가게 됐습니다. 우승을 확정 지은 홈경기 직후, 경기장에는 ‘아리랑’이 울려 퍼졌답니다. 연변FC의 전신인 연변장백산축구팀은 1965년 중국 대륙 1부리그 우승을 하며 우리 민족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공업화 속에 농업 중심인 연변 경제의 쇠퇴와 인구 유출로 축구도 힘을 잃었습니다. 올해 2부리그 꼴지였던 팀을 우승으로 이끈 것은 대한민국 국가대표 출신인 박태하 감독입니다. 2부리그 최다골과 MVP를 동시에 거머쥔 것도 K리그 신인왕 출신의 하태균 선수입니다.

연변의 수십만 동포들에게 행복의 눈물을 안겨 준 박태하 감독은 내년에도 팀을 맡기로 했습니다. 축구팬은 물론 일부 기자들도 카메라를 내려놓고 박 감독에게 큰절을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박 감독은 인터뷰에서 “선수들 2~30%만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며 부모들이 돈을 벌러 한국이나 외지로 나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한 선수의 아버지는 아들의 축구 뒷바라지를 하느라 한국에서 십년 넘게 막노동을 하다 돌아가신 일도 알려졌습니다.

연변

K의 편지는 또 다른 연변의 경사를 전했습니다.
“동포인 김진길 지린성 서기가 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네.”
TV와 신문을 통해 전해진 베이징의 중국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55개 소수 민족 중 인구 수로 13번째인 조선족에서 중앙위원이 나온 것입니다. K는 지난 9월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국가주석과 나란히 열병식에 참가한 사진을 언급했습니다. 역대 최고라는 한-중 관계가 반영됐다는 분석도 전했습니다. 김진길 중앙위원은 중학교 교사 출신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말단 공무원에서 승진을 거듭한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최근에는 소신과 독설로 유명한 도올 김용옥 선생이 ‘도올의 중국일기’ 세 권을 펴낸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연변대 객좌교수로 1년 동안 지내면서 고구려 역사유적을 살피고 중국동포들과 함께 한 경험담을 담았답니다. 연변은 모든 표지판과 간판에 한글이 위에 적히고 그 아래 중국어가 병기됩니다. 사투리 억양이 강하지만, 우리나라의 말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통용됩니다. 2년 전 우연히 목격한 중국동포들의 고사 상에는 돼지머리가 아닌 돼지 한 마리 전체가 올랐습니다. 오래 전에는 한반도에서도 내장을 제거한 돼지 한 마리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혜란강가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논의하던 정자가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고향을 떠난 선조들이 독립운동에 기여하며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그 땅에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동포들이 살고 있습니다. 직항노선이 있다면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연변 연길시 전경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Discott)

연변 연길시 전경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Discott)

이번에 선출된 김진길 중앙위원 외에도 중국의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약한 중국동포가 적지 않습니다. 중국의 핵심권력층과 의식적으로 교류하는 한국의 정치인과 경제인 중에는 자녀를 중국에 유학 보내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습니다. 한 기업인은 “과거 재미교포들이 한국의 대통령을 세우는데 영향력을 보탰듯이, 중국동포들이 그런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합니다.

백두산을 찾은 2013년 6월 마지막 주말, 우리는 운 좋게도 천지에서 일출을 목격했습니다. K와 함께 넓게 펼쳐진 천지 아래의 초원을 거닐었습니다. 초원에는 이름 모를 다양한 야생화들이 가득해,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습니다. 문득 K가 동쪽을 가리켰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 뒤편에 청산리가 있습니다.”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나선 1920년,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은 일본군 1천2백여 명을 전사시키며 대승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K는 역사와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숨졌고 그 자녀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등을 담담히 들려주었습니다.

백두산 천지에서 맞은 일출

백두산 천지에서 맞은 일출

연변FC의 훈련장이 있는 용정에는 독립운동의 산실인 대성학교가 있습니다. 그 곳에는 역사교사가 한국인 등 방문객을 대상으로 일제의 잔학상을 사진과 글로 보여주는 서글픈 여행 프로그램이 진행됩니다. 윤동주 시인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숨져갔는지, 독립운동의 유산과 후손들이 어떻게 방치되고 있는지… 견학과 설명이 끝날 때쯤이면, 적잖은 사람들의 눈에 이슬이 맺힙니다. 연변FC 선수들이 가까운 대성학교 방문을 통해 독립운동 정신으로 무장한다면, 내년 1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런지요.

외부 필진 칼럼은 본 블로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안형준 프로필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 시시각각 변화하며 새롭게 부각되는 세계 속 숨은 이슈와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냉철한 시각으로 담아내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시각의 메시지를 전하고픈 세상 돋보기의 안형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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