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속 세상돋보기] #34. 갭이어(Gap year), 따라하기 놀이? – LG그룹 공식 블로그
본문 바로가기

[이슈 속 세상돋보기] #34. 갭이어(Gap year), 따라하기 놀이?

작성일2016-07-05 오후 5:46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무언가 잃어버린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잃을 게 없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2005년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스티브 잡스가 한 말입니다.

그는 스무 살인 1974년 대학을 중단하고 인도로 떠났습니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충격과 선불교에 대한 관심, 그리고 궁극적인 삶의 목표에 대한 열정이 그를 일탈(?)로 이끌었습니다. 인도에서 승려 같은 차림으로 오랜 방황을 하던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칼 마르크스나 님카롤리바바(인도의 정신적 지도자)보다 백열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이 인류에게 더 많은 것을 베풀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 스티브 잡스는 최초의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출시하며 인류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지난 5월 미국 백악관은 색다른 발표를 했습니다. ‘영화감독이 꿈인 오바마 대통령의 딸이 하버드대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미루고 1년 동안 ‘갭 이어(gap year)’를 가질 예정’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갭 이어’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대학에 가지 않고 1년 동안 원하는 경험이나 여행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녀들의 빠른 사회 진출과 성공을 바라는 한국 부모들은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여기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갭 이어’를 거친 대학생의 평균 학점이 다른 학생보다 지속적으로 높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공부에 대한 압박을 털어내고 한발 물러나 인생의 가치와 목표에 대한 시각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맥락입니다. 미국 CBS는 지난해에 고교 졸업자 3만3천 명이 ‘갭 이어’를 택했고, 이는 2011년보다 2배 증가한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갭 이어’는 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돼 유럽으로 전파됐지만, 급격한 확산은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의 스무 살 인도여행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뜨거운 열정으로 큰 성공을 거두려면 온실 속 화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중산층과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갭 이어’가 ‘금수저의 스티브 잡스 따라하기 놀이’라고 비판받는 이유입니다. 학자금 대출과 부모의 임금피크제로 시간에 쫓기는 일반인들에게 1년의 여유는 ‘사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과 인턴, 창업과 봉사활동을 통해 진로를 탐색하며 인생의 방향을 찾는 시간의 의미를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1년의 ‘갭 이어’를 갖지는 못하더라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자기완결적인 생활구조만큼은 꼭 필요해 보입니다.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 죽어라고 공부하지만, 미국의 젊은이들은 한국 젊은이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불타는 금요일 밤이 있고, 휴일의 야외 활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리콘밸리 젊은이들의 습관을 4년 동안 연구한 앨리스 마윅 박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암벽 등반이나 사이클링, 컨퍼런스와 축제 참가 같은 체험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제대로 놀아서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면, 열정을 다해 공부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네 시간을 자면 명문대에 합격하고 다섯 시간을 자면 떨어진다는 ‘4당 5락’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4~5시간 밖에 못자면, 두뇌 회전이 원활하게 되지 않아 멍한 상태가 지속되고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대입시험에서 전국 5등을 했던 한 물리학 교수는 ‘고교 시절 교회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에 기독학생회 활동과 예배에 각각 2시간 이상을 할애했고, 농구도 하루에 40분씩 했다’고 회고합니다. 대입시험 전국 수석 출신인 한 법조인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몇 시간씩 만화책을 보거나 이어폰을 끼고 달리면서 분위기를 바꾸는 게 습관이었다’고 털어놓습니다. 젊은이의 자살율이 급증하고 있는 홍콩에서는 최근 ‘홍콩의 학생들이 교도소 수감자보다 운동시간이 적다’는 뉴스가 나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명문대 입시에 사활을 거는 한국 중고생 역시 학원과 야간자율학습으로 운동시간이 매우 부족합니다. 국내에서도 ‘하루에 1시간 이상 꾸준히 운동을 하면 성적이 향상된다’는 미국의 연구결과를 EBS가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휴식 없이 마라토너처럼 계속 공부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에 가깝습니다. 누구든지 적절히 쉬고 놀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다시 힘차게 달려나갈 수 있습니다. 만일 스티브 잡스처럼 멀리, 높게 날기를 원한다면 젊은 시절 진지한 고민과 방황 그리고 개인의 특성에 맞는 경험과 체험이 필요합니다. 운동과 책을 멀리하고 TV와 술 담배를 가까이하는 부모가 자녀의 사회 진출만을 재촉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자녀에게 휴식 없는 학습과 운동 없는 강철체력을 요구해온 관행은 제동이 걸릴 때가 온 듯 합니다. 스티브 잡스처럼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라고 충고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 블로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안형준 프로필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 시시각각 변화하며 새롭게 부각되는 세계 속 숨은 이슈와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냉철한 시각으로 담아내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시각의 메시지를 전하고픈 세상 돋보기의 안형준입니다.

'이슈 속 세상돋보기' 시리즈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