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속 세상돋보기] #35. 걸크러쉬(Girl Crush) – LG그룹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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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속 세상돋보기] #35. 걸크러쉬(Girl Crush)

작성일2016-08-23 오전 11:00

“원래 신입으로 뽑을 나이가 아닌데 (대표 변호사가) 강력 추천했어요.
그런데 사법연수원 졸업 후 경력이 전혀 없네요?”

“연수원 나와 바로 결혼해서 전업주부로 십여 년을 살았죠.”

15년 동안 검사 남편과 두 남매 뒷바라지를 해온 여주인공이 늦깍이 변호사를 시작합니다. 남편이 성접대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면서 생계가 막막해졌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처음 맡은 사건에서 전업주부의 억울한 살인누명을 벗겨내면서 첫 발을 멋지게 내딛습니다. 최근 중년 여성들의 호응 속에 방송 중인 드라마 ‘굿와이프’의 도입부입니다. 드라마에서는 15년간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법률회사에 환상적으로 안착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성공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물구나무를 섰는데… 몸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손에서 뿌리가 돋았어…(중략)
나는 음식 필요없어, 물이 필요한데……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정신병원에 수용된 주인공 영혜는 음식을 거부하며 나무가 되길 원합니다. 몇 년 전부터 고기를 거부하며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막대에 매달린’ 꿈을 꾼 뒤부터입니다.

한강 연작소설 (출처: 네이버)

한강 연작소설 (출처: 네이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 <채식주의자>의 일부입니다. 소설가 한강 씨는 1997년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소설을 내놓았습니다. 한 여성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였습니다. 두 소설에서 여성의 존재는 화초나 나무로 상징됩니다. 피를 봐야만 하는 고기가 아닌 ‘평화’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화분에 갇히거나 땅에 뿌리를 내려 움직일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드라마 굿와이프 여주인공의 판타지 같은 성공스토리는 ‘채식주의자’와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우리나라 여성의 현실은 ‘굿와이프’보다 ‘채식주의자’의 등장인물들과 가까워 보입니다. 대한민국 남녀 임금격차는 36.7%입니다. 남자가 100만 원을 받을 때 여성은 63만3천 원을 받는 것입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가운데 남녀 임금격차가 가장 큽니다. 대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3.3%로 남성(89.3%)의 2/3 수준에 불과합니다. 특히 30대 여성은 출산과 육아로 경제활동참가율이 34% 대로 떨어집니다. 대한민국의 양성평등 수준은 조사한 145개 나라 가운데 115위라고 세계경제포럼(WEF)은 밝혔습니다. 인도나 네팔보다도 여성이 차별받고 있다는 조사 결과입니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한 일부 직종에서 여성의 두각은 남녀평등이 이뤄진 듯한 착각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외교관 시험 합격자의 65%가 여성’이라는 기사나 ‘연수원 출신 판사 임관 여성 비율 77.8%’ 같은 제목은 ‘남녀 평등이 이미 완성됐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강남 화장실 묻지마살인 희생여성 추모행사에 참가한 여성들의 신상을 털며 여성혐오 논쟁을 제기한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구속된 범인은 ‘여자들이 항상 나를 무시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인 도쿄대 우에노 교수는 이런 현상이 ‘남성이 여성을 소유물로 두면서 사회를 만들어 온데서 기인한다’고 설명합니다. 우에노 교수는 동아시아에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다면서 2008년 도쿄 무차별 살인사건 범인이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텐데’라고 언급한 것을 지적했습니다. 지켜보기 불편한 여성혐오 논쟁도 벌어지지만, 곳곳에선 변화의 조짐도 보입니다.

“배터리가 다 돼서 전화를 못 받았어♬…그게 말이 되니?♪
내가 무슨 바보니?♬…Shut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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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음원차트에서 돌풍을 일으킨 걸그룹 언니쓰의 ‘셧업(shut up)’ 가사입니다.
남자친구가 몰래 다른 여자와 어울리다 연락이 두절된 상황, 여성은 더 이상 홀로 눈물지으며 분을 삭이지 않습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대신 “변명은 됐고, 닥쳐”라고 외친다는 것입니다. 셧업을 성공시킨 ‘언니쓰’는 뒤늦게 꿈을 이루려 도전한, 여섯 여성 연예인들이 만든 ‘언니들의 걸그룹’입니다.

빅데이터 분석업체인 다음소프트는 지난달 최근 5년 동안 언급된 ‘언니’에 대한 분석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결론은 쿨하고 자립적인 ‘걸크러쉬’ 트렌드입니다. ‘소녀(Girl)’와 ‘반하다(Crush On)’를 합성한 걸크러쉬는 여성끼리 성적 감정이 없이 느끼는 강한 호감을 말합니다. 걸크러쉬 언급 수가 2011년 4만3천 회에서 지난해 14만6천 회로 3배 이상 늘었습니다. 언니와 관련된 표현도 ‘착하다’는 표현은 8% 줄어든 반면, ‘멋지다’와 ‘당당하다’는 각각 23%와 19% 증가했다고 다음소프트는 밝혔습니다. ‘언니들’의 정체성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집 장만은 남자가 할 일’이라는 고정관념도 깨지고 있습니다. 최근 6년 동안 결혼한 여성의 31%는 신혼집 비용을 남성과 함께 부담했다고 보건사회연구원은 발표했습니다. 또 미혼남의 79%, 미혼녀의 72%는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 준비’라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젊은 남성들의 의식 변화도 놀랍습니다. 연구원 측은 ‘주거비의 급상승으로 여성은 물론 친정까지 같이 부담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얼마전 ‘열등한 남성, 사회적응력 키워라’라는 기획기사를 실었습니다. 선진국의 블루칼라 남성이 실직하지 않고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간호사나 미용사가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여성이 고정관념을 깨고 외과의사와 직업군인이 됐듯이, 남성도 변하고 노력해 보이크러쉬(Boy Crush) 트렌드에 올라타야 한다는 충고였습니다. ‘여성혐오’의 뿌리가 일자리 경쟁에서 밀려난 남성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남성과 여성 사이에 혐오는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용불안과 주거비 상승으로 고생하는 젊은이들에게 혐오 대신 썸을 타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까요?

외부 필진 칼럼은 본 블로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안형준 프로필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 시시각각 변화하며 새롭게 부각되는 세계 속 숨은 이슈와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냉철한 시각으로 담아내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시각의 메시지를 전하고픈 세상 돋보기의 안형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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