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속 세상돋보기] #37. 義로운 사람들 – LG 공식 블로그
본문 바로가기

[이슈 속 세상돋보기] #37. 義로운 사람들

작성일2017-02-07

새해 1월 20일.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깃든 도시, 이탈리아 베로나 인근 고속도로에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헝가리 고등학생 40여 명을 태운 버스 한 대가 철제 방호벽을 들이받고 화염에 휩싸인 것입니다. 이탈리아 스키 수학여행을 주도한 체육 선생님은 불타는 버스에서 많은 학생들을 꺼내 목숨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숨진 16명의 명단에는 선생님의 아들과 딸의 이름이 포함됐습니다. 버스에 있던 자신의 자녀보다 다른 학생들을 먼저 구한 것입니다. 헝가리는 전국적인 ‘애도의 날’을 선포했고, 현지 특파원들은 체육 교사의 의로운 행동을 본국에 급히 타전했습니다.

화재로 타버린 버스와 버스의 뒤편엔 아직 다 진압되지 못한 불들이 보인다.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지난해 11월 22일, 경기도 부천시의 한 빌라에 큰 불이 났습니다. 빌라 4층에 사는 일가족 다섯 명이 불길을 피해 베란다로 대피했습니다. 119소방대가 사다리차로 구조를 시도했지만, 빌라 주변의 촘촘한 전선 때문에 중단됐습니다. 퇴근길에 이를 목격한 한 시민은 간판 설치작업에 쓰던 자신의 크레인을 몰고 와 소방대원들을 베란다에 올려 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가족 5명은 모두 구조됐습니다. 크레인 기사 원모 씨는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했을 뿐이라는 표정으로 현장을 떠났습니다.

크레인에 올라탄 실루엣과 불길이 치솟고있는 주택

최근에 발생한 이 두 사고에서는 의(義)로운 사람이 다치거나 희생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화재나 교통사고, 총격현장 등에서 타인을 구하다 숨지거나 장애를 입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의사상자 지원법이 제대로 시행되기 전인 2005년, 전국 곳곳을 누비며 의사자(義死者) 유족과 의상자(義傷者)들을 만났습니다. 도쿄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다 숨진 젊은 대학생은 예외였지만, 의사자 대부분은 집안의 가장이었습니다. 남은 유족들은 생계가 막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좌절한 아내의 얼굴과 아빠를 못 보게 된 어린이의 표정은, 셰익스피어가 살아난다 해도 표현하기 힘든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인 것은 의로운 죽음과 행동은 이성을 가진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북미대륙에 서식하는 벨딩땅다람쥐는 코요테나 오소리 같은 포식동물을 발견하면, 고음의 스타카토 소리로 위험이 닥쳤음을 알립니다. 소리를 들은 다른 땅다람쥐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지만, 경보음을 울린 땅다람쥐는 잡혀먹힐 가능성이 매우 커집니다. 동물들이 목숨을 건 의로운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부 생물학자들은 자신과 DNA가 유사한 피붙이들의 생존을 바라는 ‘이타적 번식 본능’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폴 셔먼 박사의 관찰 조사에 따르면, 수컷보다 암컷이 20% 정도 경고음을 더 많이 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모형을 종이로 오려진 사진

무리 지어 살아가는 동물의 이타적 행동은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민족 전체의 생존과 인권을 구하는 독립운동 역시 치명적인 희생을 각오해야만 가능합니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수만 명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희생을 선택했습니다. 3년 전, 그런 독립운동가의 손녀를 미국 산호세에서 만났습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상해임시정부 기록에 나오는 분이고, 그녀의 아버지 역시 항일운동에 투신했다가 중국 조선족자치주의 공무원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문화혁명 때, ‘지방 민족주의자’로 몰려 고문과 투옥 등 온갖 고초를 겪습니다. 손녀 역시 ‘반동의 자녀’라는 비난과 돌팔매질을 당하며 부모의 옥바라지를 해야 했고, 결국 미국 이민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녀 집안의 독립운동과 고난의 역사는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라는 책으로 남았습니다. 그녀가 할아버지의 고향인 밀양과 상하이를 직접 방문하며 검증한 저서에는, 영화 <암살>이나 <밀정>에 등장하는 친일파 밀정들이 얼마나 큰 부를 누리며 살았는지 잘 기록돼 있습니다. 밀정들에게 공통된 ‘배신의 DNA’는 동물을 상대로 한 연구에서는 주목할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듯합니다.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 책의 표지

독립운동가 김대지의 손녀가 풀어쓴 한민족 100년사,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책

영화 속 독립운동처럼 조직을 꾸리고 폭탄과 무기를 준비하려면 적잖은 자금이 필요했고, 지금은 재벌로 성장한 당시 민족자본가 일부도 위험을 무릅쓰고 자금을 지원했던 사실이 알려져 왔습니다. 1914년 부산에서 결성돼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백산상회에는 GS그룹의 뿌리인 허만정 선생이 포함됐습니다. LG를 창업한 구인회 선생은 1942년 중경 임시정부를 위해 쌀 5백 가마니에 해당하는 1만 원을 지원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대동공업을 창업한 김상수 선생은 ‘머지 않아 해방이 온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다, 일본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면 총독부에 의해 온갖 고초를 겪은 반면, 친일파 사업가는 빠르게 세를 확장해 갔다고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선생은 설명합니다.

손과 손이 악수하듯 맞잡은 사진

지난해 11월 크레인을 동원해 이웃을 화재에서 구한 시민은 뜻밖에 의인상(義人賞)과 상금을 받았습니다. 한 대기업이 2015년부터 ‘용감하고 의로운 행동으로 생명을 구하고 피해를 막은’ 시민들에게 의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기업은 또 항일투쟁에서 옥고를 치르거나 희생된 독립유공자와 후손을 찾아, 낡은 집을 고쳐주는 ‘독립유공자 주거환경 개선 사업’도 벌이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돈이 아니라 의로움을 선택한 사람들을 칭찬하는 작은 불꽃이 꺼지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 블로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안형준 프로필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 시시각각 변화하며 새롭게 부각되는 세계 속 숨은 이슈와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냉철한 시각으로 담아내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시각의 메시지를 전하고픈 세상 돋보기의 안형준입니다.

'이슈 속 세상돋보기' 시리즈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