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링을 위한 힐링] #34. ‘봄 처녀’ 가라사대 – LG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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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링을 위한 힐링] #34. ‘봄 처녀’ 가라사대

작성일2014-10-17

안녕하세요. 저는 개, 즉 반려동물입니다. 제 이름은 ‘봄’입니다. 저를 입양한 집의 주인이 지어주었습니다. 저를 입양한 시기가 봄철이어서 가족들이 이렇게 이름을 붙였나 봅니다.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상태에서 저를 낳아준 엄마 품을 떠나야 했지요. 그게 어찌나 슬프고 겁이 났던지, 무척 울었나 봅니다. 네 살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제 한쪽 눈가에는 그때의 눈물 자국이 까만 얼룩으로 남아 있는 걸 보니 말입니다. 이제는 어릴 적 겪은 이별의 ‘상처’를 잊고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 나이, 이제 곧 네 살이니 적지 않습니다. 저 같은 반려동물 중 개의 평균수명은 대략 15년이라 합니다. 그 4분의 1가량을 살았네요. 사람으로 치면 스무 살 정도 되겠지요. 사람의 평균수명이 대략 80이라 하니 말입니다.

반려동물

저를 입양한 새 식구들과 지내면서 저는 제 가족들과 잘 지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불과 두 달만 같이 보낸 제 생모보다 지금의 가족들이 더 ‘핏줄’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잣대로 치자면 ‘낳은 정(情)’, ‘기른 정(情)’ 이런 정서로 곤혹스러워하고 힘들어하겠지만, 저는 ‘쿨’ 해지기로 했습니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낳은 정’보다는 매일 마주하는 ‘기른 정’이 제 모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제 생각은 이러한데 어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사람과 제 생각의 ‘차이’는 이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제 가족들이 저를 대하는 경우만 봐도 그렇더군요. 저는 누구 할 것 없이 제 가족 모두에게 제 마음을 한결같이 드러내 보여줍니다. 아빠와 엄마, 언니와 오빠에게도.

아차, 그러고 보니 제가 ‘여자’인 것을 미리 말씀 못 드렸네요. 동물로 말하자면 암컷이지요. 게다가 반려동물에게 필수처럼 이뤄지는 이른바 ‘중성화’ 수술도 없었지요. 가족회의 끝에 내린 결론이지요. 예민한 성격의 저를 위해 나름 고려한 결정이라 하네요. 여태 수태한 적도 없으니 아직 저는 ‘처녀’ 몸입니다.

어떻든 저는 제 가족이 소중하고 이렇게 길러주는 게 고마워서, 그 ‘감사(感謝)’하는 마음을 가족에게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반가워서 꼬리 치고, 달려들어 안기고 입 맞추고. 이 모든 제 행동은 다 ‘감사’의 표시입니다. 이 순간, 이 자리에 같이 있고 또 함께하는 일이야말로 다른 그 무엇에 앞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가치라는 생각에. 어디서 얼핏 들은 얘기입니다만 “늘 감사하며 살아라. 그리하면 하늘이 널 도울 것이다”는 말처럼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반려동물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합니다. 고마워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가도 똑같은 대상에게 어느 순간 그 반대로 돌변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제가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만, ‘감사’라는 게 자기 기분에 따라 맘대로 주물럭거려 모양을 바꿀 수 있는 찰흙 같다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또 하나, 사람들을 보며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게 있습니다. 저 같은 반려동물들이 자기 가족 (사람들은 이 경우 ‘주인’이라고 말하지요)에게 이렇듯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을 ‘복종한다’고 인식하더군요. 꼬리 치고, 납작 엎드리다시피 기어서 다가가고, 얼굴 비비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두고 말입니다. 반려동물들이 제 가족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행동이 사람들에게는 제 주인에 대한 복종으로 비치나 봅니다.

동물은 같은 종(種)에서만 ‘복종’이 이뤄집니다. 동물이 사람에게 ‘숙이는’ 것은 복종이 아니라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걸 사람의 시각에서 복종이라 판단하는 것이지요. 이런 인식은 사람이 동물보다 월등하게 우월한 존재라는 판단에서 비롯되었겠지요.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감사하는 마음

그렇다면 이런 가정(假定)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사람, 동물이 사는 지구는 수천억 개 전체 별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 수많은 천체 가운데 어느 곳에는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고등(高等) 생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존재’가 지구의 ‘사람’을 인지하고서 이렇게 재단(裁斷)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치 사람이 소를 오로지 먹을거리의 하나로 보듯, 그렇게 말입니다. 그 ‘존재’가 사람을 먹을거리로 결론짓고 볶아 먹을까, 삶아 먹을까, 아니면 레어/미디엄/웰던 어떻게 구워 먹지 한다면? 모를 일입니다.

“되지도 않게 무슨 ‘개 짖는’ 소리냐?” 하실 법도 합니다. 제 말씀은 ‘자기 시각과 판단’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그 인식의 편협성을, 그 위태로움을 전하고자 함입니다. 

저는 제 가족들에게 일관되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를 많이 좋아하든 조금 덜 좋아하든 가족들의 사랑이 전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도 상대방에게 그렇게 해보시길. 아울러 역지사지(易地思之) 심정으로 다가가면 자신이 평소에 생각지 못하던 것을 깨우치게 되는 전환점이 생기리라 믿습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 블로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상상 프로필

대기업 사보편집자로 사회생활을 시작, 좋은 선배와 동료들 덕분에 이 일에 재미를 들여 커뮤니케이션 업무 분야에서 오롯이 15년을 일했다. 지금은 잡지 등에 자유기고가로 글을 쓰며 그간의 경험과 이력을 반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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