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속 세상돋보기] #19. 고독, 렌탈 그리고 포옹 – LG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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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속 세상돋보기] #19. 고독, 렌탈 그리고 포옹

작성일2015-03-27

“빨래 안 걷었어?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아! 밥값을 해야지”
현관문을 열며 귀가하는 미용사 아내가 남편에게 내뱉은 말입니다. 서울대 출신인 39세 아빠는 10년째 집에서 빈둥거리는 백수입니다. ‘아빠도 다른 아빠들처럼 일을 했으면 좋겠어, 아빠가 필요한 아이에게 잠깐 아빠를 빌려주면 어떨까?”라고 평소 말하던 초등학생 딸 아영이는  ‘학교 나눔의 날’ 행사 때 폭탄선언을 합니다. “저는 아빠를 나누겠습니다.”
같은 반 친구로, 아빠와 사별한 진태는 캐릭터 니모 담요를 아영에게 건네고, 아영은 아빠를 빌려줍니다. 진태는 집에 가서 아영 아빠와 장난감 칼싸움, 물총놀이를 하며 행복해 합니다.

영화 아빠를 빌려드립니다
영화 ‘아빠를 빌려드립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지난해 개봉한 영화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의 한 장면입니다.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사회변화의 단면을 섬세하게 반영하며 마니아층이 생겨났습니다. 영화의 모티브는 지난해 초 처음 보도된 ‘시급 남편 서비스’로 추정됩니다.

“시급 남편이 필요하십니까? 관심 있는 분들 쪽지로 부탁드려요”
몇 시간씩 남편 역할을 대신하고 돈을 받는 남편 대행 서비스가 디지털세상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여성 회원은 비공개로 프로필을 작성하고, 남성은 공개된 쪽지에 가명으로 키와 몸무게, 특기와 활동 가능한 지역을 올립니다. ‘30대 초반 호남형, 181cm 79kg, 서울 서대문구 거주, 전기와 주택관련 시설업무, 카운슬링 가능한 비흡연자’라며 SNS 아이디를 남기는 방식입니다.  여섯 살 아들을 둔 30대 중반의 이혼여성은 아빠와 동물원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꿈을 이뤄주고 15만 원을 제공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영화감독과 제작자들의 새 트렌드를 따라잡는 능력이 돋보입니다, 조만간 <포옹해 드립니다> 라는 제목의 영화도 제작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커들러(Cuddler), 스너글러(Snuggler)라고 불리는 전문가들이 포옹만 해주는 직업이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성관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침대에서 낯선 사람을  껴안아 주거나, 고객의 품에 안겨주는 직업이 미국에서 뜨고 있다고 지난 1월 보도했습니다. 뉴욕의 커들러인 한 30대 여성은 시간당 80달러, 하룻밤 400달러에 고객을 맞이합니다.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손님이 있는 날에는 침대의 가족사진을 치우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손님과 침대에 눕습니다. 그녀의 일은 손님에게 안기거나 간지럼 태우고 포옹해 주면서 심리적 안정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포옹

‘커들러’의 등장은 5년 전, 심리학 전공자로 스트리퍼로 활동했던 트래비스 시글리(27)가 샌프란시스코에 ‘커들 테라피'(Cuddle Therapy)를 연 게 시작이었다고 이 신문은 설명했습니다. 시글리는 치료사와 고객 간에 신체 접촉을 못 하는 데 좌절해 이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무료 앱인 ‘커들러’는 2014년 9월에 출범한 뒤 불과 넉 달 만에 24만 회의 다운로드를 기록했으며 매일 7천∼1만 명이 이용한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덧붙였습니다.

2년 전 일본에서는 친구를 빌려주는 서비스가 시작돼 인기를 끌었고, 드넓은 중국에서는 명절에 부모님을 대신 방문해주는 서비스가 성공을 거뒀습니다. 남편과 친구, 자식을 빌려주는 가족 역할 서비스의 확대는 가족이 해체되는 사회흐름 속에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1인 가구와 이혼율의 가파른 증가 속에 아빠와 엄마, 두 자녀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으로 상징되던 화목한 가정은, 많은 이들에게 이루기 힘든 꿈이 돼버린 듯합니다.

“통증이 시작되면, 저를 산부인과로 데려가 주세요”
다시 영화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입니다. 남자친구가 도망간 예비 미혼모는 아기를 낳을 때 같이 병원에 갈 대행 서비스를 신청합니다. 진태와 놀아주고 돈봉투를 받은 아영의 아빠는 온라인 중고사이트에 ‘아빠 렌탈’ 사업을 론칭하고, 친구의 피시방에도 ‘아빠 렌탈’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본격화합니다. 결손가정 모자와 프로야구 경기 응원을 같이 가고, 바쁜 아빠를 대신해 학교 배식 봉사활동도 대신 맡습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에게 아들 노롯도 하며 사업을 확장합니다. 영화는 사업의 성공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지만, 아내와 딸은 아빠의 존재에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심리적 안정

옥스퍼드대 연구팀은 최근 로봇과 인공지능의 급신장 속에 로봇에게 일자리를 뺏기지 않을 직업을 골라 발표했는데요. 로봇이 따라할 수 없는 행태인식과 상식이 강조되고, 창조성과 통찰력이 필요한 직업들이 안전지역으로 평가됐습니다. 특히 레크리에이션 치료사, 정신상담가, 치과의사, 패션디자이너, 주요 관리직종 등이 꼽혔습니다.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의 아빠 역할은 어찌 보면 레크리에이션 치료사와 정신상담가의 역할을 합친 것과 비슷한데요. 현재의 외로움과 미래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가족을 빌리고, 적지 않은 돈을 주고 따스한 포옹을 해야 하는 21세기의 문명인들. 어쩌면 고독이 일상화된 디지털세상에서 가정의 화목과 부부의 사랑 같은 심리적 안정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심리적 자산이 된 것을 아닐는지요. 그 심리적 안정을 구입해 소유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잠시 돈을 내고 체험하려는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한, 가족 역할 대행과 성관계 없는 포옹 같은 정서적 지원을 하는 서비스는 블루오션일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 블로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안형준 프로필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 시시각각 변화하며 새롭게 부각되는 세계 속 숨은 이슈와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냉철한 시각으로 담아내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시각의 메시지를 전하고픈 세상 돋보기의 안형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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