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링을 위한 힐링] #84. 신사임당의 미소 – LG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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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링을 위한 힐링] #84. 신사임당의 미소

작성일2017-01-05

여느 날처럼 청솟길에 나섰습니다. 한 손엔 빗자루, 다른 손엔 쓰레받기를 들고. 매일같이 반복하는, 하루 일과를 여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단순 단조로운 ‘행사’가 매번 똑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날은 부피로 따져 30리터 정도 되는 주홍색 쓰레받기에 하나 가득 잡동사니가 채워지는가 하면, 어떤 날은 절반도 안 차기도 합니다. 그깟 쓰레기 치우는 것 하나에도 매일매일의 모양새가 이리 다르니, 메트릭스처럼 얽히고 설킨 세상살이는 어제오늘이 전혀 딴판이라는 세간의 목소리가 하나 틀림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빗자루질 하며 새삼 여러 상념으로 혼자 씨익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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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은 비교적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그 사흘 전에 십수년 만에 처음이라는 눈이 서울에 쏟아져 제가 청소할 구역의 일정 부분이 이들 눈들로 메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폭설이 내린 그날, 그 다음날까지 허리가 끊어져라 한바탕 제설작업을 해야 했었지요.

두 손에 청소 도구를 들고 기다란 배수구쪽에 켜켜이 쌓여 있는 눈더미를 쳐다보니 새삼 며칠 전 ‘노동’이 다시 되살아나며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이 올라갔습니다. 그날 내린 눈은 많은 힘을 쓰게 했습니다. 어떤 눈은 솜털처럼 가볍기도 하지만 이번 눈은 ‘물 머금은 솜’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눈을 치워본 경험이 있는지요? 넉가래로 한쪽 구석을 향해 주욱 밀게 되는데, 1미터도 못 가 딱 멈추게 됩니다. 마치 롤케이크처럼 둘둘 말리다 사람의 힘으론 도저히 밀 수 없는 무게로 커지며 넉가래를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이 지경에서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삽질’뿐입니다. 한 삽 한 삽 떠내어서 배수구쪽으로 나르는 일, 그날은 하루종일 ‘삽질’만 해댔지요. ‘설경(雪景)’? 이 말은 이런 눈을 치울 처지가 아닌 사람들에게 자연이 내리는 선물입니다.

필링힐링 #84 이미지_2

아무튼, 그날도 습관처럼 배수구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여태 며칠 전 그 모양인 곳도 있고 제법 녹아든 곳도 있고, 그 와중에 조그마한 쪽지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쓰레기 치울 요량으로 무심코 들이댄 빗자루 앞에는 눈 얼음 속에 파묻힌 노란 지폐 한 장이 드러났습니다. 아이들 돈놀이용이려니 하고 빗질을 하려다 깜짝 놀랐습니다. 진짜 돈이었지요. 5천원? 가만 보니 ‘0’이 하나 더 있는 5만원권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길가나 어디에서 100원 이상 주워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제일 먼저 제가 한 행동은 주위를 두리번거린 것입니다. 마치 내가 무엇을 훔쳐내기 위해 주변을 살피는 것처럼. 이런 제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이내 저는 이 ‘희한한’ 현실에 흥분마저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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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 지폐는 눈 얼음에 딱 붙어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이 “손쉽게 가져가지는 못해” 하며 절 쳐다보는 것 같았지요. 여러분이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납작하니 들어붙은 지폐를 원형 그대로 들어내기란 어려웠습니다. 주변에 내팽개쳐져 있는 벽돌로 ‘캐내야만’ 했습니다. 그럴 게 아니라 후다닥 달려가서 뜨거운 물을 가져다 뿌려볼까, 하는 궁리는 ‘그 사이 다른 사람이 이걸 발견하면?’에서 접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것은 내 것이야 하는 심사와 다를 바 없겠지요. 결국은 무디고 거친 벽돌 한 장으로 조각하듯 주변을 파고 캐고 했습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아, 최근에 내가 이처럼 공들여 신경 쓴 게 또 있었던가?’ 했습니다.

거저 5만원을 얻기란 생각보다 어려웠지요. 온전히 뜯어내기엔 너무 잘 얼음에 붙어 있었고 벽돌이 그런 상태를 ‘무장해제’시키기엔 적합한 도구가 아니었지요. 20여 분의 ‘공사’ 끝에 지폐는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일부는 조각난 상태로 얼음에 남았고.

이 날의 일은 제게 한동안 잊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길바닥에서 5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횡재했다는 금전적 의미, 여기에 더해 그 돈을 본 순간 제게 닥친 야릇했던 흥분, 무엇보다도 그 길지 않은 시간과 사건이 제겐 짧지만 일종의 카타르시스로 작용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살다가 큰일에 부딪히면 그 일의 부피나 무게만큼으로 대응하게 되고, 사소한 일에는 또 그만큼의 대응력으로 대처하게 되는 게 일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작아졌다 커졌다, 부풀어올랐다 쪼그라들었다, 이러면서 살아가는 게 삶이 아닌가 싶네요.

※ 외부 필진 칼럼은 본 블로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상상 프로필

대기업 사보편집자로 사회생활을 시작, 좋은 선배와 동료들 덕분에 이 일에 재미를 들여 커뮤니케이션 업무 분야에서 오롯이 15년을 일했다. 지금은 잡지 등에 자유기고가로 글을 쓰며 그간의 경험과 이력을 반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