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군부의 요람, 내피도 국방박물관을 가다 – LG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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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부의 요람, 내피도 국방박물관을 가다

작성일2013-03-21

미얀마의 행정수도는 이름부터 생소하다. Nay Pyi Daw 로 쓰고 ‘내피도’라고 읽는다. 식민지 시절부터 외국에 널리 알려진 수도 양곤(Yangon)은 여전히 경제의 중심이지만, 대통령 궁이나 정부 부처를 모두 내피도로 내줬다.

미얀마 여행 사이트들마다 절기상 1월이 미얀마 관광의 최적기 중 하나라고 써놓았다. 열대 햇빛의 강렬함이 한층 사위어지고 적어도 아침 저녁엔 청량한 날씨를 즐길 수 있단다. 지난 1월 중순 양곤에서 중고 미니 밴을 빌려 타고 4시간을 족히 달렸다. 양곤과 내피도를 연결하는4차로 고속도로는 통행 차량을 하나 둘 셀 수 있을 정도로 드문드문했다.
진행 차로의 차량은 셀 수가 없다. 앞 뒤 차량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진행차로는 휑하다. 덕택에 곧 부서질 것 같은 중고 미니 밴은 뻥 뚫린 길을 시속 120km로 무섭게 내달렸다. (실제 한 차례 시동이 꺼져 뙤약볕 밑에서 반 시간 수리를 해야 했다)

경제와 행정수도를 연결하는 으뜸 간선도로 사정이 이렇다면, 두 도시간 물자나 인력의 교류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럴진대 한반도의 세 배나 넓은 땅에 천km 이상 흩어진 도시들은 어떤 고리로 연결 지을 수 있을까. 미얀마 사람이란 정체성은 또 어떻고?  질문이 꼬리를 물지만, 짧은 출장으로 해답을 얻기는 무리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통행료 수입으론 콘크리트 고속도로를 잘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내피도는 미얀마 국토를 동서로 가르는 벨트 모양 평야지대의 한 가운데 ‘조성돼’ 있다. 저지대의 한복판에 세운 계획도시이다 보니 딱히 중심가도 없어 한적한 휴양지를 연상시킨다. 대형 쇼핑센터 매장 직원에게 시 인구를 물어보니 자신 없는 어투로 ‘20만 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중에 산 지도책을 보니 100만 명을 훌쩍 넘긴다. 도심이 빈약하다 보니, 인근 광활한 농가 거주민까지 모두 내피도 인구로 잡힌 듯하다.

내피도를 조성한 군사정부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민주화 시위의 중심이 된 양곤이 불편해서 그 격을 떨어트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일부 야당인사들이 얘기하는 ‘점 쾌’의 결과일 수도 있다. 실제 미얀마에서는 국교인 불교와 함께 정령신앙에 가까운 토속신앙의 흔적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군부 지도자가 점을 쳐 내피도 이전을 결정했다는 소문은 그래서 그럴 듯하게 확산돼 왔다.

본디 의도가 어떻든, 내피도는 미얀마의 오늘을 있게 한 ‘군부의 영욕’을 고스란히 담은 곳이다.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인 것도, 독립 직후 국정혼란을 두 차례나 수습한 것도, 그리고 쿠데타 이후 잇따른 실정(失政)이 빚어낸 대규모 민간시위들을 강경하게 진압한 것도 모두 군부였다. 미국 등 서방세계는 오랫동안 미얀마의 군부를 규탄하고 견제해왔지만, 미얀마 군부 지도자들은 이런 외부세계에 할 말이 적지 않을 것 같았다. 내피도의 쇼핑센터를 둘러본 뒤에 일부러 시 외곽 국방박물관을 찾아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기이한 국방박물관

국방박물관은 일단 엄청난 규모로 우리 일행을 압도했다. 여의도 공원만한 면적에 용산 전쟁박물관 만한 건물이 4개동 들어섰다. 육해공 등 각 군종별 전시실과 역사관이라고 한다. (소개 브로슈어가 따로 없어 행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들 전시동을 긴 회랑이 연결하고 있어 하늘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박물관 부지는 H자 모양을 하고 있다. H자의 한쪽 길이가 대략 500m이다. H 중앙의 대형 분수대는 군사 퍼레이드용일 성 싶다. 공간 밖에도 독립전쟁 때 활약했던 항공기 등이 전시돼 있다.

<내피도 군사박물관 전경 />

정오가 임박한 시간인데도 방문객은 우리 일행뿐이다. 입장권 판매처도 보이지 않아 운전기사가 박물관 입구 경비요원에게 외국인이라고 양해를 구해 입장했다. 무릇 박물관의 존재의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 있을 터, 문턱이 낮아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피도의 국방박물관은 왜 이리 인적이 뜸한 대형 상징물이 돼 있을까.

전시동 모두를 둘러보기엔, 시간도 빠듯했지만 그보다 먼저 다리가 저려왔다. 한 전시동에서 이웃 전시동으로 옮겨가려면, 대략 200미터 대리석 회랑을 걸어가야 한다. 방문객이 거의 없으니 편의시설도 없다. 식당 팻말을 찾아 한참을 걸어 찾아간 곳은 과자를 파는 간이매점. 허기를 해결할 곳이 없는 기이한 박물관이었다.

필자 일행이 두 번째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콘텐츠의 빈약함. 박물관의 위압적인 규모 탓에 빈약함은 더욱 도드라진다.
야당의 압승으로 끝나버렸지만, 지난해 3월 재보선을 두 주 앞두고 부랴부랴 개장한 탓일까. 가장 풍성한 내용을 갖추고 있어야 할 역사관조차 다소 맥 빠진 사진자료와 초기 군장(軍裝) 등으로 채워졌다.

미얀마 군부의 영욕이 서린 곳

이런 와중에 단연 우리 일행의 눈길을 끈 것은 역사관 벽면엔 걸린 세 사람의 대형 초상화였다. (아래 사진) 중앙엔 미얀마 독립을 이끈, 현 아웅산 수치여사의 부친 아웅산 장군의 초상화다. 비극적인 죽음(정적에게 암살됐다) 탓에 더욱 국부로 추앙 받는 인물인 만큼 3인 초상화 중 1인치 정도 높게 걸려 있다. 아웅산 장군과 함께 독립군 활동을 했고, 이후 버마군을 창설했으며 최초로 민간정부를 뒤엎은 네윈 장군이 오른쪽. 1988년 민주화 시위 직후 쿠데타로 집권한 딴쉐 장군이 왼쪽에 걸려 있다.

<미얀마 역사를 상징하는 세 장군의 초상화 />

네윈은 독립 직후 극심한 사회 혼란기에 두 차례나 민간정부의 ‘요청으로’ 질서회복을 위해 군대를 출동시킨 경력이 있다. 미얀마 군부로선 쿠데타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웅변해줄 없어서는 안될 지도자일 것이다. 그러나 딴쉐 장군의 초상화를 박물관에 들여놓는 것은 시기상조란 느낌. 역사적 공과를 떠나, 현존인물이기 때문이다. 정복엔 훈장도 많이 달려있어 다른 두 사진보다 어색해 보였다. 딴쉐 장군은 2011년 민정이양 후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아웅산 장군은 한때 우군으로 간주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알고 나선 막바지 전쟁을 치렀다. 역사관에는 일본군 복장의 아웅산 커리커쳐가 표지를 장식한 일본 잡지가 전시돼 있다. 70년이 흐른 뒤 일본은 개발원조와 기업투자란 당근을 들고 미얀마 시장으로 돌아왔다. 경제 제국주의란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해온 미얀마 군부로선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적과 동지를 나누고 구원(舊怨)을 풀어내기엔 미얀마의 현실이 너무 척박하다. (아래 사진은 양곤 북쪽 빈민촌. 도심을 몇 키로만 벗어나도 이런 구역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양곤 외곽 빈민촌 /> 

미얀마 정부군은 아직도 분리독립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북부 소수민족(꺼친 족)과 교전 중이다. 네윈의 쿠데타도 당시 민간정부가 소수민족의 분리 움직임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한 것이 직접적 계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 족이 미얀마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지금 미얀마 군부의 가장 큰 우려는 연방의 와해일 것이다. 국방 박물관이 보여주고자 하는 군부 치적의 대부분은 식민 세력과의 전쟁연방에서 이탈하려는 소수민족과의 전쟁이었다.

두 전쟁은 군부의 과거 현재의 존립 근거이자, 아직까지도 형식적 민주주의를 완성하지 못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물론 야당은 털끝 만큼도 이런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LG

박래정 프로필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고, 열번 사진으로 남기는 것보다 한번의 글로 남기는 것이 더 낫다' 란 소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글만큼 좋은 것이 없지요. 업무 상 '해외의 것'을 자주 들여다보게 되는데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며 아이디어를 짜보는 게 주업입니다.